* 목회자의 설교 표절은 큰 윤리적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부족한 설교문을 나눕니다만 아무리 급해도 이 설교문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그냥 그대로 설교하셔도 될 정도로 좋은 설교문도 아닙니다.)
* 새벽기도회 설교는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한 짧은 설교입니다.
논리적인 강해와 학문적인 주석보다는 기도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개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023년 10월 26일 아틀란타한인교회 새벽예배 설교
오늘의 찬양
: 주님 말씀하시면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담은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고 찾으실 때, 두려 숨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원수의 땅 니느웨로가서 회개를 선포하라 명하셨을 때 자신이 세상의 끝이라 여긴 다시스까지 도망하여 숨고자 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예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자리, 있어야할 곳 바로 여기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예레미야 24장 1-10절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얼마 전 H마트에 갔다가 제가 어릴 적 너무 좋아했던 망고맛 푸딩 젤리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크기가 커지고 작은 버전은 나오질 않는데 제가 어릴 적에는 크기가 아주 작게 나왔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학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100원짜리 동전을 내고 그거 낱개로 하나 사 먹는 것이 소소한 낙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이 푸딩젤리를 톡-하고 입에 털어 넣다가 그게 목구멍을 턱 막아서 죽을 뻔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고로 죽는 아이들이 많아서 이제는 이렇게 작은 푸딩젤리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눈앞이 하얘지고 숨이 안쉬어져서 켁켁되다가 다행히 기침을 하는데 성공해서 이 푸딩젤리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이것이 제가 ‘진짜 이제 죽는구나.’ 하면서 죽음의 문앞까지 갔다 돌아온 다섯 번째 사건입니다.
초등학생때 이미 다섯 번째라니 도대체 김주평 목사는 어떤 삶을 살아 온 건지 궁금하시죠? 저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이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추억을 떠올리며 이 젤리를 무려 8불짜리 큰 통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서 야금 야금 꺼내먹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젯밤에 출출해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없는 거예요. 아내랑 저랑 사는 데 먹을 게 없어지면 범인은 누구일까요?
뭐지 이걸 다 먹었다고? 하고 실망감에 냉장고를 다소 격정적으로 닫는데, 닫치는 힘에 반대로 냉동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짜잔~ 냉동실에 이 통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윽고 또 다른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아니 이걸 냉동실에 두면 어떡합니까? 푸딩은 시원하고 부드럽게 먹어야 맛있는 건데 말입니다.
여러분, 음식은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 맛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그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이들과, 있지 말았어야 할 곳에 있었던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그리고 징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통하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이들을 ‘좋은 무화과’로, 있지 말았어야 할 곳에 있었던 이들을 ‘악한 무화과’로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전 앞에 놓인’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이 무화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물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광주리로 나뉘어 담겨있는 이 무화과들. 여기까지는 이 두 개의 광주리에는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2절부터는 이 둘이, 아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며 명확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매우 좋은 것, 하나는 매우 악한 것.
여기서 좋은 무화과에 붙은 수식은 더욱 특별합니다.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라고 표현되었죠. 특별히 ’처음 익은 것‘이라는 표현은 이 열매가 왜 옳고 좋은 헌물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앞에, 즉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놓여 진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무화과는 어떨까요? 악한 무화과는 그 수식하는 표현이 아주 직접적입니다. ‘아주 나뻐서 먹을 수 없는’.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들입니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들이지요.
4절부터 주욱 읽어보면 각각의 무화과들이 어떤 무리를 빗대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을 볼 때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 남부에 있는 갈대아지역, 즉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라는 예언, 그 예언에 의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끌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이 ‘좋은 무화과’가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껏 예레미야를 읽으며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다 심판 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어 줍니다. 붙잡혀간 자들은 오히려, 축복받을 수도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아는 그 마음을 ‘받은’ 사람들.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내게 전심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가 됩니다. 영어 because에 해당하는 ‘כִּֽי(키)’라는 히브리어 접속사가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 생략된 것입니다.
따러서 이 말씀에는 인과관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 때문에 그들이 내 백성이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무화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포로된 자들을 갈대아 땅으로 보내셨고, 그들을 좋게 여기실 것이며, 그의 눈을 그들에게 선하게 두시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두면,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킨다면, 결국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들은 우리가 이번 달에 예레미야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만났던 예레미야의 체험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1장 10절 읽어드리겠습니다.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정확히 반대로 “내가 그들을 세울 것이다. 내가 헐지 않겠다. 그들을 심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세워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이제 악한 무화과들은 어떤 무리인지 볼까요?
8절을 보니까 두 종류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애굽에 거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
또 하나는 끌려가지 않고 도망쳐서 잡히지 않고 그 땅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 지도층 안에는 친애굽 세력과 친바벨론 세력 이렇게 두 세력 간의 알력이 있었습니다. 이미 국력은 쇠하였고 이제 어딘가에 기대어 살아남아야 하는데 – 지도층 중 상당수가 너도나도 당시 가장 강한 나라들 중 하나에 붙으려고 한 겁니다. 마치 구한말, 조선에도 친러파, 친미파, 친일파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때문에 바벨론이 유다를 완전히 정복하기 직전에, 애굽쪽에 붙어서 바벨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친 애굽파들은 패색이 짙어졌을 때 애굽으로 피신하거나 망명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는 채찍을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도망친 이들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애굽 망명파 뿐 아니라 두 번째 집단,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탈출해서 그 땅에 남은 자들 역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일하심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악한 무화과’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8절부터 10절 끝까지 보면 그들의 끝이 어떠한가가 선포됩니다.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그들에게는 심판이 더 강렬하고 맹렬하게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연단이 아닌 처벌로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에 유다가 함락되기 전,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바벨론에 유다가 멸망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이 씌우시는 그 바벨론의 멍에를 ‘스스로’ 쓰자는 것이었죠.
이 멍에를 피해 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엔 여호와의 심판을 자신의 능력으로, 지혜로 피하여보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연단 받는 자리에 있어야 할 이들이 그 연단의 자리를 피해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어디로 도망가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경고입니다. 그 노력은 오히려 근본적으로 피할 길 없는 심판을 더 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 또한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 사실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되어 살아가야하는 데, 우리의 죄된 욕망은 자꾸 나의 의를 앞세우고, 나의 지혜를 앞세우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의중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제 친동생 같은 오랜 제자가 하루는 어느 늦은 시간, 살짝 술에 취해 찾아와서는 제게 그랬습니다.
‘형 때문에 하나님 믿고 나서 – 너무 불편해요. 기도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또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잘 살고 있는 거야. 신앙이란건 하나님을 통해 내 삶의 소망을 이루는게 아니라,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뤄드리는 거거든.’
그랬더니 그녀석이 ‘알아요, 괜히 그래봤어요. 하고 인사 꾸벅하고 집에 가더라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음 두신 곳에 있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임을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진행형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만난 말씀처럼, 바벨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연단의 도구’였습니다. 그 연단 속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하나님을 만나 돌아올 좋은 무화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있지 말아야할 자리로 발걸음하여 더 큰 화를 만날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또한 오늘 우리가 고백한 찬양의 가사처럼, 주님이 가라시면 가고, 멈추라시면 멈춰야하지 않겠습니까?
계속되는 예레미야의 예언, 그중에서도 특별히 오늘의 예언은 – 참 불편합니다. 칼과, 기근, 전염병, 그리고 흩어짐과 환난, 부끄러움, 말거리가 되게 함, 조롱과 저주 등등 불편한 표현이 이 말씀 안에서 널을 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진 심판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 속에서 그들을 연단하신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저, 돌이키기만 한다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만 하면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다는, 그래서 다시금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희망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들려야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다면 우리는 절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고 신뢰하기‘만’ 한다면 – 우리는 그 안에서 희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선포,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도 바로 그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목회하다보면 어떤 성도님께서는 제가 말씀을 전하고 내려오면 왜 그렇게 설교하느냐고 상처받았다고, 서운하다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 맘이 참 아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그렇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면이 있고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잖습니까?
오늘 제가 전한 말씀이 저를 포함한 우리 아틀란다한인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를 소원합니다. 소망합니다. 축복합니다. 축원합니다.
그러나! 불편함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주님이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여 돌이킴으로써, 우리 모두가 주님의 좋은 무화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주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를 아껴주시는 어떤 성도님은 오늘도 이 설교를 들으시고, 제가 오늘 나눈 설교 말씀을 또 누군가는 오해하고 저를 미워할 것을 염려하셔서 걱정 어린 조언을 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라. 나 여호와를 아는 마음을 주리니 돌이키라.”
우리가 그 말씀에 주저함 없이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응답하는 좋은 무화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인도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자리, 있어야 할 곳에 있음으로 좋은 무화과 되는 우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https://youtu.be/_qnLNR0uM4I?si=xWsHtXRFKPa463XJ
김주평 목사 설교 / 있어야 할 곳에 / 예레미야 24장 1~10절 설교